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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역사상 1천년래 제1대 사건' 묘청의 서경 천도의 난
  • 편집국
  • 등록 2023-01-04 12:28:40
  • 수정 2023-01-04 12: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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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승리하였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사건(一千年來第一大事件)’이라 하지 아니하랴.

단재 신채호


단재 신채호는 조선사 연구초에서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상 1,000년래 제1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묘청의 난

(妙淸-亂, 1135년 1월 19일(음력 1월 4일) ~ 1136년)은 고려 인종 때 승려 묘청 등의 금국정벌론과 서경 천도론이 개경 귀족들의 방해로 무산되자 서경(西京)에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 군호(軍號)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여 대위국(大爲國)을 선언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배경

서경천도론을 처음 내세운 사람은 묘청이었다. 그는 일관 백수한을 제자로 삼고 이른바 음양비술이라고 일컬었으며 당시 고려에서는 풍수가 일종의 통치 이념이었다. 풍수설을 바탕으로 서경세력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 결과 정지상을 비롯하여 내시낭중 김안, 홍이서, 이중부, 문공인, 임경청 등이 묘청의 풍수설에 매혹되었다. 그는 유교를 신봉하는 관료들의 사대적이고 유약한 태도를 비판하면서 칭제건원, 즉 중국처럼 왕을 황제라 부르고 연호도 중국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풍수지리사상에 입각하여 개경은 이미 지세가 다 했고, 서경의 임원역에 궁궐을 지으면 36방의 주변국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릴 것이라며 왕을 설득했다. 묘청 이외에도 정지상, 백수한 등이 칭제건원과 북벌에 적극 동조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大家)로 알려졌던 묘청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고려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은 수도인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약한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따라서 나라를 중흥하고 국운을 융성하게 하려면 지덕이 왕성한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덕(地德)이 다한 개경을 버리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면 금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고, 중심국가가 될 수 있다고 묘청이 주장하였다. 묘청 일파는 역대 고려 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에 의거하여, 인종의 용기를 북돋워 개경의 문벌 귀족 세력에 맞서 서경천도 운동을 추진하였다. 

당시 고려 사회에는 신라 말기 이래 풍수지리설이 크게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묘청 등의 주장은 큰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다. 

묘청은 곧 인종의 총애와 함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되었고, 묘청의 건의를 받아들인 인종은 1127년(인종 5) 이후 서경에 자주 거둥하였다.


서경파와 개경파의 갈등

1131년(인종 9)에는 인종을 설복시켜 새 궁궐에 팔성당(八聖堂)을 신축하여 보살·석가·부동(不動) 등 8개의 상(像)을 그려서 안치시켰다. 이듬해 1132년 왕은 이자겸(李資謙)의 난으로 불타버린 채 있던 개경의 궁궐을 영수(營修)함에 있어 묘청과 그 일파들에게 궁터를 보게 하니, 묘청은 서경 천도를 목적으로 개경의 궁터가 서경의 그것보다 못하다고 역설하여 드디어 공사는 중지되고 왕은 묘청의 인도를 받으며 서경에 내려가 천도를 결정지으려 했으나, 김부식, 임원개, 이공승, 이지저(李之底) 등 김부식 등은 새로 도읍지를 건설하면 백성이 과도한 노역에 시달리고 막대한 경비가 든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


그러나 인종은 다시 개경으로 가서 머물다가 1132년 왕궁이 수축되자 서경행을 결심한다. 왕궁을 수축하자 다시 서경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때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고 돌풍이 불기 시작했다.이때문에 인종을 태우고 가던 말들이 놀라 엉뚱한 곳으로 달려가 진창에 빠져버렸고, 호종하던 시종들은 왕의 행방을 잃고 찾아다니는 사태가 발생했다. 게다가 그날 밤 눈발이 날려 낙타가 죽고 말과 사람이 다치기도 했다. 서경 가는 길에 사고가 발생하자 개경파 귀족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묘청을 배척하는 소리가 높아갔다. 1133년 직문하성 이중, 시어사 문공유 등이 상소하여 묘청을 비롯한 그 일당들을 멀리할 것을 상소하였지만 인종은 수용하지 않았다. 인종의 신임을 확신한 묘청은 다시금 '칭제건원'을 상소하였지만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되자 조정은 묘청이 이끄는 서경세력과 김부식이 이끄는 개경 세력으로 분리되어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친 왕은 마음이 바뀌었다.


김부식

당시 조정 안에는 서경 천도 계획에 반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김부식이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들은 정지상·묘청 등 서경파의 의도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개경파의 반발에 초조해진 묘청 일파가 지나친 농간을 부린 것이 폭로되자 유신들의 강경한 반대가 대두되었다. 결국 인종은 서경 천도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평가

묘청의 난에 대한 평가는 찬반이 분명하다. 조선 말 일제 강점기 초기에 활동했던 신채호는 민족사관의 입장에서 묘청의 난을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으로 평가한다.


영향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고려사회는 표면상 평온을 되찾았으나, 이 반란이 고려사회에 끼친 영향은 컸다.

우선 권력구조에서 서경의 지위가 크게 격하되었다. 이와 함께 고려 권력구조의 균형이 깨졌다. 즉 서경 세력은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담당하여 왔는데, 서경 세력의 쇠퇴는 개경의 문신 귀족 세력의 독주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문신(文臣)의 위신을 높이고 무신(武臣)을 멸시하는 풍조를 낳게 하여 후에 무신의 난을 유발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문신 귀족 세력은 더욱 득세하게 되어 왕권마저 능멸하는 풍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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