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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섭! 이 자식 뭐야!" 서울대 한국사 난이도 시험 출제에 1등급 떨어진 학생 화가 나서 튀어나온 한마디.
  • 편집국
  • 등록 2023-01-05 10:47:25
  • 수정 2023-01-05 10: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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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년 1월 5일에 왕궁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오래전 서울대 수능시험에서 선택과목이었던 한국사 문제에 의열단 김지섭을 묻는 난이도가 출제되었다. 의열단의 김원봉 나석주, 김익상, 김상옥 등은 기억하나 대부분 김지섭은 최상의 난이도 문제일만큼 세심하게 공부하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게 마련이다.

수능을 치룬 어느 한 학생이 김지섭 때문에 1등급이 떨어졌다고 시험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지면서 "김지섭! 이 새끼 뭐야!" 육두문자를 쓰고 문을 발로 쾅 차고 나갔다는 일화가 있다.


추강 김지섭

김지섭(金祉燮, 1884년 7월 21일 ~ 1928년 2월 20일)은 의열단원으로 일본 왕궁에 폭탄 투척을 시도한 한국의 독립운동가다. 호는 추강(秋岡)이며, 경상북도 안동(安東) 출생이다.

의열단

의열단장 김원봉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1919년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으로 망명, 1922년 의열단에 입단하였고 상하이·베이징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23년 한국내 일본 시설 파괴를 위해 폭탄 36개를 상해에서 안동을 거쳐 서울로 반입하려고 하였으나 황옥(黃鈺)이란 일본 첩자의 활동으로 일본에 발각되어 동지 3명이 붙잡히고 그는 김원봉, 장건상 등과 상해로 피신하였다.
이후 9월 1일 관동대지진으로 한인들이 학살 당한 소식을 듣고 1924년 동경에서 개최되는 제국의회에 참석하는 일본 고관들을 저격하고자, 폭탄 3개를 휴대하고 1923년 12월 20일에 상해를 출발하여 31일 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1924년 1월 3일 도쿄에 잠입하였으나, 제국의회가 무기한 연기되었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계획을 변경하여 일본 궁성(宮城)의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기로 했다. 1월 5일에 왕궁진입을 시도하며 폭탄을 던졌으나, 3개 모두 불발되고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조선 민중 전체의 의사를 대표한 사람"이고 폭탄이 불발했으니 불능범이라 무죄를 주장했으나, 검찰은 사형을 구형하고 재판부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시곡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옥고를 치르다 천엽형무소(千葉刑務所)로 이감되었다. 1927년에 징역 20년으로 감형되었으나 1928년 2월 20일 뇌일혈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종적 감추어 바다에 뜬 나그네 그 아니 와신상담하던 사람 아니던가

 평생 뜻한 바 갈 길 정하였으니 고향을 향하는 길 다시 묻지 않으리'


투옥되어 신문을 하는 도중에도 독립을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당당하게 외치던 그의 투철한 정신과 그가 남긴 시구를 들여다보면 비록 서울대 시험 1등급에 떨어졌다고 욕을 들어야 한다면 대한민국의 교육은 과연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자문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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