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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일을 기억해야 한다.
  • 편집국
  • 등록 2023-01-31 12:42:28
  • 수정 2023-01-31 12: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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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오독립선언은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이며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

1919년 2월1일 무오독립선언서

2월8일 일본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이 발표한 2.8독립선언서

3월1일 대한독립선언서

3대 독립선언서로 인정받고 있는 무오독립선언서에 대해 알아보자.


  • 무오독립선언은 기미독립선언에 앞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이다.
  • 3·1 운동 당시 발표된 독립선언서와 구별하기 위해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 라고도 한다. 조소앙(趙素昻)이 작성하였고 당시 해외에서 활동중이던 독립운동가 39명이 서명하였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선포한 독립선언서이며 2·8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했으며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1919년 2월 (또는 1918년 11월), 만주 길림에서 만주와 연해주 및 중국,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 중인 독립운동가 39명의 명의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선언서의 작성과 서명이 사전에 이루어졌음을 고려하여, 별칭으로 '무오독립선언' 또는 '길림선언'으로 불리기도 한다.

  •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은 의병활동을 지원하고 항일독립운동의 서막을 연 연해주 지역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해외의 모든 독립운동가들이 뜻을 모은 독립선언이다.
  • 무오독립선언의 발표일이 2월1일인 이유는 1919년 당시 음력으로 1월1일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무오독립선언서 내용
  • 우리 대한은 완전한 자주독립국임과 민주의 자립국임을 선포하고, 우리 대한은 타민족의 대한이 아닌 우리 민족의 대한이며, 우리 한토(韓土)는 완전한 한인의 한토이니, 우리 독립은 민족을 스스로 보호하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지 결코 사원(思怨)의 감정으로 보복하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또한 일본의 병합수단은 사기와 강박과 무력폭행 등에 의한 것이므로 무효이니, 섬은 섬으로 돌아가고 반도는 반도로 돌아오고, 대륙은 대륙으로 회복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2천만 동포들에게는 국민된 본령이 독립인 것을 명심하여 육탄혈전함으로써 독립을 완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 무오독립선언 연서자 39인

  • 김교헌, 김규식, 김동삼, 김약연, 김좌진, 김학만, 여 준, 유동열, 이 광, 이대위, 이동녕, 이동휘, 이범윤, 이봉우, 이상룡, 이세영, 이승만, 이시영, 이종탁, 이 탁, 문창범, 박성태, 박용만, 박은식, 박찬익, 손일민, 신규식(신정), 신채호, 안정근, 안창호, 임 방, 윤세복, 조용은, 조 욱, 정재관, 최병학, 한 흥, 허 혁, 황상규 


서명자들의 소속단체는 재만 대종교, 동제사, 신흥무관학교, 국민교육회, 대한광복회, 재려 한족회, 재미 국민회 등 당시 주요 민족운동단체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기미독립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 중 조국 광복을 본 사람은 15인인 데 비해, 평균연령이 5세나 적은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은 39인 중 불과 11명만이 광복을 맞았다. 무오독립선언 연서자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투쟁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2.9독립선언서와 기미독립선언서에 앞서며, 일정부분 영향을 주었다 할 수 있으며

내용을 보면 알수 있듯 가장 적극적인 대일항전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독립선언서 기초작성자 조소앙(사진 출처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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