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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상설영화관 - 영화전문극장으로는 첫 장을 열었으며 상업적인 흥행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
  • 기사등록 2023-02-17 13:21:00
  • 기사수정 2023-02-17 13:3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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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고등연예관(京城高等演藝館)은 

1910년 2월 18일에 개관한 조선 최초의 상설영화관이다.

원래 1909년 10월 개관 예정이었으나 10월26일 안중근의사에 의해 이토히로부미가 암살을 당하여 애도기간을 거친 후 4, 5개월이 지난 후 1910년 2월로 개관이 미뤄졌다고 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는 조선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 위치는 현재의 을지로2가 외환은행 본점 옆 자리인 황금정 63통 7호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11년 8월경 황금정 도로확장으로 건물이 헐리게 되자 황금정 3번지로 장소를 옮겨 다시 신축되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을 소유하고 있던 인물은 영화배급사였던 K다이아몬드사와 관련 있던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였다. 내부는 이른바 ‘기석’(奇席)이라는 일본식이었고, 2층은 다다미, 아래층 객석은 긴 의자로 배치하였다. 수용인원은 4~5백명 정도였고, 건물의 외관이나 내부 설비를 현대적으로 구비하였다. 또한 ‘요시자와(吉澤)상점’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 영사기사를 영화상영을 위해 고정배치 하였고, 프랑스 ‘파테회사’의 영사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현대적 시설을 갖춘 탓에 경성고등연예관의 입장료는 이전의 다른 극장들에 비해 큰 폭으로 인상되었는데 특등석은 1원(현재 가치로 5만원)을 받았다. 이 요금은 극장 입장료로서는 가장 비싼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이 비싼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경성고등연예관의 영화상영은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당시 관람자들의 60%는 조선인이었으며 40%는 일본인인 까닭에 항상 긴장관계였으며 일제의 문화통치에 의한 압박이 심했던 터라, 단어 검열을 거치는가 하면 극장 밖에는 항상 일본경찰이 감시하고 있었다.


경성고등연예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고 사회적으로 관심거리가 되자 고종황제가 이들을 궁내로 초대해 정부관리와 황실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주 와다나베에게 하사금을 주어 격려하기도 했다. 황제가 일반극장의 영사시설을 궁내로 불러들여 영화를 관람하고 극장 주인에게 하사금까지 주었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경성고등연예관은 당시 서울에서 사회적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1912년 7월에는 『매일신보』의 평양지국개설을 기념하는 영화상영회를 평양에서 열기도 했는데, 이 행사 역시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는 사실이 당시의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경성고등연예관 측은 지방순회상영을 시도함으로써 영업의 범위를 넓혀나가기 시작했지만 그 같은 순회상영은 1912년 8월의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사망을 계기로 곧 중단되었다


비록 경성고등연예관의 존속기간은 짧았지만 본격적인 영화전문극장으로는 첫 장을 열었으며 상업적인 흥행의 중심지 역할을 함으로써 조선에 영화가 보급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극장의 소유주가 일본인이며, 일본 자본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은 일본인이 조선의 영화시장을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일본은 문화산업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생산력이나 국력면에서 서구문물 수용에 빠르게 대응하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던 결과 근대화에 성공한 반면 세도정치로 일관한 조선은 결국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의 운명이 결정되어졌다는 사실에 참으로 안타갑다는 생각을 해본다.


 


K다이아몬드 상회의 이름이 있는 경성고등연예관 전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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