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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축하성 & 삼전도비
  • 편집국
  • 등록 2023-02-24 20:01:38
  • 수정 2023-02-24 20:5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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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한겨울 꽁꽁 언 삼전도 나루터에서 세 번 절하면서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니(삼궤구고두례) 이마에선 피가 흐르고 눈에선 쉴새없이 눈물을 흘리던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인조는 이를 절대 항복하지 않고 단순히 성에서 나온다는 뜻인 하성이라고 표현했고, 신하들에게도 이를 강요했다고 하여 정축하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정축하성(丁丑下城)은 

다시 말해 병자호란때 남한산성에 피신한 인조가 농성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 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행한 것을 말한다. 

흔히,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 표현된다. 

마치 장례를 치르듯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고 빈관과 함께 항복'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세 번 절을 할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도록 하는 굴욕적인 의식이었다. 이 당시 임금이 오랑캐라 여기던 만주족 군대에 굴복했다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와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공황과 충격을 주었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복을 기념하여 삼전도에 기념비를 세우도록 했다.

병자호란 때 승리한 숭덕제가 자신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에 삼전도비가 1639년(인조 17년)에 세워졌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01호로 지정되었다. 만주어, 몽고어, 한자어로 쓰여져 있다. 


 치욕적인 역사이기에 1895년 삼전도비를 바다에 빠트렸다가 조선은 예로부터 예속된 국가였음을 알리기 위해 1913년 일제에 의해 다시 세워졌고 이를 부끄러이 여긴 조선은 행방 후, 다시 삼전도비를 땅 속에 파묻었다가 논란 끝에 다시 세워져 수난의 연속을 거친 삼전도비의 역사를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이를 숨긴다고 부끄러운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부끄러워할게 아니라 처절하리만치 가슴 아팠던 우리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뿐만 아니라 후세대들에게도 이러한 역사가 있었음을 상기시킬 수 있도록 반면교사로 삼아 좋은 교훈이 되도록 해야 한다. 

남한산성(사진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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