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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의 진원지 고부관아를 복원한다
  • 편집국
  • 등록 2023-04-27 16:15:22
  • 수정 2023-06-08 15: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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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쩌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사진 취재 -투데이스타 김병하 국장
기사 -투데이스타 김달님


고부관아 복원을 위한 전문가토론회 개최

2023년 4월 21일 국회의사당내 의원회관 3층 세미나실에서 고부관아 복원을 위한 전문가토론회가 있었다.
참석자 오른쪽 전북대 신병욱, 군산대송석기, 경희대 임형진,청주대 김양식,동학역사 문화연구소 조광한 소장, 이학수 정읍시장, 국회의원 윤준병, 충북대 신영우, 전북도의원 여명선, 영남대 임경희, 고부관아 복원추진위원회 위원장 김철모


"일제가 만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서 고부관아 건물을 학교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학정의 상징이자 동학농민혁명이 최초로 발발했던 이곳을 복원하는 작업은 매우 의미가 있으며 교육적 측면이나 역사 바로 알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학수 전북정읍시장)


"동학혁명의 원인제공자인 고부 군수 조병갑이 썼던 곳이자 녹두장군 전봉준이 공격했던 고부 관아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는 논의가 이전부터 있어왔었지만 이번에 한걸음 더 나아가 논의가 한층 뜨거웠습니다. 동학정신을 가진 농민군들에 의해서 그곳이 함락되었다는 의미를 되새기다보면 그야말로 동학정신도 되살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줄 역사의 장이 될 것입니다."  (임형진 경희대학교 후마니스타칼리지 교수 동학학회장)  


<토론 내용>

현재 이곳은 110년 전에 설립된 전북 정읍시 고부초등학교, 이 학교는 한때 26학급으로 제법 큰 규모를 갖춘 학교였으나 오늘날 재학생 30명 남짓 작은 학교다.


고부관아는 영조 41년 (1765)에 설치되어 1911년 철거될 때까지 현 고부초등학교 자리에 있었고 갑오년 당시 동학혁명군의 1차 목적지로 그곳은 부패한 조선사회와 탐관오리의 탐학이 집약된 현장이자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기에 전봉준 등 동학혁명은 그곳을 향해 진격했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고부봉기 이후에도 동학농민혁명의 전 과정에서 고부관아는 고부지역의 혁명 근거지이자 호남 동학혁명군의 전진기지 역할을 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을 침탈한 일제는 동학농민혁명을 의식해 1911년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고부공립보통학교"를 건립하였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하나라도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전통문화유산을 말살하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려던 일제의 만행을 그대로 드러낸 증표가 되고 말았다.


고부관아에 대한 인식은 현재의 우리도 대동소이하다. 고부봉기가 한국 근현대사의 커다란 물줄기를 이룬 중요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2004년 제정된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 특별법"에서는 대상에서도 빠졌고 국가기념일 제정에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특히 특별법에 의거한 국가기념일 제정으로 한정하는 바람에 고부에서의 의거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7월 14일의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이나 7월4일 미국의 독립혁명 기념일처럼 세계의 유명혁명기념일들이 모두 처음 깃발을 들어 올린 날이나 최초로 발생한 역사적 사건을 중심으로 국가기념일을 제정한 데 비하여 동학농민혁명만은 예외가 되었다. 과연 고부봉기 없이 무장기포나 백산대회 등 동학농민혁명을 설명할 수 있으며, 그 정신이 올바르게 계승될 수 있을까?

현재는 고부초등학교에 자리 잡고있지만 "동학농민혁명 길"이 완성될 수 있으면 정읍시만이 가질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순례길 또는 둘레길이 되어 정읍시를 찾는 전국의 관광객뿐 아니라 외국관광객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답사 루트로 제공, 역사성을 바르게 계승시키고 선양하는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부봉기 역사>

 곡창지대로써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매우 심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 고부에의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부정부패와 횡포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난 농민항쟁이다.


농민들에게 필요하지도 않은 저수지인 만석보를 다시 쌓도록 해 백성들을 혹사시켰고, 그 저수지의 물에 세금을 붙여 강제로 수세를 거두어들여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등 횡포가 날로 심해졌던 것이다.


조병갑의 횡포에 농민들이 1894년 1월 몰락한 양반 출신인 전봉준을 지도자로 추대하였고, 추대된 전봉준은 전라도 고부 인근의 농민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계획하였다.


1894년 1월 전봉준이 농민 1천여 명과 함께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횡포를 일삼던 아전들을 처벌하였으며, 관아의 곡식을 풀어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이던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처럼 동학농민혁명은 전봉준의 고부봉기를 시작으로 백산봉기 - 황토현 황룡촌전투 - 전주성 점령 - 전주화약 체결 등의 순서로 막을 내렸다.

 

어쩌면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긴 했으나 내부적으로는 갑오개혁, 외부적으로는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농민군들의 마음을 대변한 전봉준, 자그마한 체구에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뿜어내었던 전봉준을 소재로 한 시 한 편과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던 사진 한 장이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서울로 가는 전봉준 /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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